회색 미션
누가 나한테 부탁을 한다. 앞모습 보다 뒷모습이 더 멋지거나 무서운 사람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오해를 해명할 시간도 없이 이런식이면 이제 그만두라는 얘기를 듣는다. 부탁 받은 일을 해내기 위해 작은 차로 어두운 골목에서 길을 찾는다. 넘을 수 있는 담벼락이나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을 찾는다. 철조망 중간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간다. 들어오니 경기 중인 야구장 한 가운데다. 검은 하늘을 매섭게 쏘아대는 조명. 공중에서 팽팽하게 다가오는 하얀 점을 피해야 한다. 야구공이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다. 들어온 곳의 건너편 문으로 나가기로 정한다. 선수들의 가쁜 숨 소리가 주변을 스친다. 나는 있는 듯 없는 사람. 아무도 내 눈을 발견하지 못한다. 조용히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부탁받은 일을 처리해야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뒤돌아선 몸과 단호하게 뜬 눈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션을 다시 더듬어본다. 내가 무얼해야..? 철조망을 빠져나가자 보통의 거리가 나온다.
넋을 놓고 서 있는 사람이 있다. 누구를 만나야 할지, 이제 어디에 가서 무얼 하면 좋을지, 방금까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따져보고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저녁밥을 먹어야 살죠. 시간이 지나고 있어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변함없는 표정으로 그가 대답한다. “발을 딛고 있는 그 방향으로 쭉 걸어가 보세요.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지어주는 밥이 있을 거예요. 저는 도망가는 중이에요. 정하거나 해야 하는 일을 아주 잊어버리게 되는 때에 발을 뗄 것이에요.” 그가 한 곳에서 멈춰 넋을 놓고 있는 것처럼 나도 거기서 눈을 감았다. 아픈 허리를 그나마 덜 아프게 하는 자세로 통증을 잊으며 잠시 서있는다. 이상한 시간이 흘렀다. 눈이 오는 건지 먼지가 내리는 건지 하늘이 흐렸다. 분명 밤이었는데 회색의 세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시 밤이 되기 전에 나는 일을 해내야 한다. 그게 무슨 일이든. 줄 맞춰 있던 가로수 한두 개가 옆으로 조금씩 이동한다. 흰색 눈이 회색을 모두 덮게 되면, 가로수는 조금씩 발을 끌었으므로 마침내 다른 위치에 놓여있을 것이다.
막막한 우울이나 편안한 희망이 깜빡 깜빡거린다. 둘은 동시에 존재해서 결국 나를 어디에 있어도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넋을 잃은 사람으로 만든다. 멈춘 사람. 회색 공중에서 짓눈깨비가 조금씩 시간을 늘린다. 어둡던 골목의 끝이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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